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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인격과 시민정신이 깃든 이 조직속에서 언젠가는 위대한 사회가 이룩되리라 믿는다.



    헨리 기젠비어 (1892~1935)
    Henry Giessenbier


    미국 Jaycee전쟁기념본부 전시관에는 헨리 기젠비어의 청동 흉상이 세워져 있다.

    높이 2피트의 이 구리 흉상은 "헨리 기젠비어"라는 인물에 비하면 작은 기념품에 불과하다.

    그는 인내심이 대단한 인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야망이 강했다.

    그러므로 가젠비어의 야망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이기심이 아닌 타인과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그의 굳은 결심 때문이었다.

    그의 꿈은 타인을 위한 봉사에 있었다. 

    그의 계획은 많은 젊은이들이 지역사회의 현안문제에 참여하고 대중을 위해 헌신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전망은 오직 Jaycee라고 하는 세계적인 단체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헨리 기젠비어는 1892년 7월26일 기젠비어 집안의 6남매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나 미조리주 센 루이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친은 엄격하면서도 친절한 독일인 이민자였고, 그의 모친은 유순하고 정이 두터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기젠비어 가족은 1990년 초 센 루이스의 평범한 중산층 집안들 중의 하나였다. 비록 빈곤에 허덕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헨리는 매우 어렸을 적부터 일을 배웠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헨리는 일찍이 현실에 눈을 떠 사회생활에 뛰어든 것이다.


    1909년 기젠비어는 은행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 후 은행은 그의 영원한 직장이 되었다. 처음 몇년 동안은 은행업무를 배우기 위해 무수한 열정을 쏟았다. 장부정리나 그 밖의 업무를 공부하기 위해 그가 은행에서 밤을 세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1910년 그는 허큘라네움 댄스 클럽을 차렸다. 사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이 클럽은 뒷날 청년진보시민연합(YMPCA)의 기초(基礎)가 된 것이다. 이때가 1915년. Jaycee의 전신인 이 단체는 단지 댄스클럽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젊은이들의 공민과 지역문제 참여라고 하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단체는 그후 "Junior Citizens"로 이름을 바꾸었고 (JC's하는 약자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1918년 센 루이스 상업회의소와 연합한 이후 그 명칭이 지금의 청년상업회의소(Junior Chamber of Commerce)로 변경된 것이다.


    Jaycees창설자의 타인을 위한 봉사는 그 단체 밖에서도 이루어 졌다. 애국심이 남달랐던 그는 일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2년동안 육군 하사관으로 복무하였다. 고향으로 보내진 그의 편지에는 당시의 전시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 포탄 투하가 시작되던 어느날 그는 참호속에서 커버를 씌우고 있는 한 병사를 지나치게 되었다. 그때 그 병사는 기젠비어에게 같이 참호속으로 피하고자 사정했다. 그러나 기젠비어는 뭔가가 자신을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고 말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몇분 후 그 참호는 직격탄을 맞고야 말았던 것이다. 결국 기젠비어의 고집은 그의 생명을 구한 셈이다.


    제대 이후 그는 다시 전격적으로 Jaycees 활동에 관여했다. 1920년 여름, 제1회 내셔녈 컨벤션에서 이 단체의 공식명칭이 미국청년회의소로 확정지어 졌으며, 기젠비어는 이때 제1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국 Jaycees에 대한 그의 전망을 이렇게 피력했다. "... 이제 이 위대한 단체의 운명은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Jaycees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를 적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요구와 관심을 수렴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기젠비어는 Jaycees 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나 클럽에도 가담하여 그의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그는 광고 클럽을 운영하는 등 특히 대중 감화 연설에 커다란 열정을 보였다. 기젠비어의 성공은 단지 이들 단체활동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그는 또한 뛰어난 금융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성공가도는 당시의 젊은이들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헨리 기젠비어는 그러나 항상 병고가 끊이질 않았으며 1930년에 들어 그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몇 차례의 수술을 받고 다시 그의 활동이 재계되는 듯 했으나, 1933년 은행불법거래 및 자금처리과실 문제에 연루되어 사실상 그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지금까지 대중봉사를 위해 헌신해 왔던 한 사람으로서 그 사건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사건의 원인은 경제공항으로 빚어진 자연손실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 소송은 중도 기각되었다. 비록 그의 혐의가 완전히 풀리고 명예도 회복되었으나, 그 사건은 마치 검은 구름처럼 그의 인생을 뒤덮고 있었다. 법원 청문회가 끝나고 일년이 채 못되어 그는 신장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가 1925년 11월 7일, 미국 Jaycees의 또 다른 선구자인 존 암부르스터는 이렇게 그를 기렸다. "그는 영광이 무엇이고, 또한 역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둘을 똑같이 취급했다. 그는 영광에 안주하지도 않았고 역경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의 인생은 그가 아무리 험난한 길을 가고 있더라도 분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그런 삶이었다."


    기념관에 세워진 그 동상은 헨리 기젠비어라는 위대한 인물을 상징하는 하나의 작은 조감품에 불과하다. 그의 인품과 정신은 Jaycees를 통하여 영원히 반영(反映)될 것이다.